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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5-09 13:11
박희소 목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259  



주님과 함께한 한결같은 50년 목회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박희소 목사는 한결같았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박 목사는 1971년 뉴욕 롱아일랜드 교회를 창설했고, 1975년 뉴욕 동부교회를 설립한 뒤로 30년간 묵묵히 목회 활동을 해 온 원로목사다. 2005년 은퇴 후에도 미주기독교 방송국의 사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해 온 박 목사는 현재에도 깊은 신앙심으로 젊은 목사들과 교류를 끊지 않고 있다. 고희(古稀)를 넘어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등산을 다닐 정도로 건강한 박 목사는 올해로 성역 49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반세기 동안의 종교 활동은 그에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었다.



미국 선교 활동의 선구자

박희소 목사의 미국행은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법대에 낙방하면서 낙심한 그는 차선책으로 숭실대를 선택했으나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했던 1년간의 방황이 채찍이 되어 남은 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제1회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광나루에 있는 교회에 부목사로 목회하던 때 그의 담임목사였던 김동기 목사의 유학 권유로 30대 중반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당시에 담임목사님께서는 상당히 깨어 있는 분이셨어요. 부목을 3년 정도 했을 때인데 제게 ‘더 늦으면 공부 못 한다’면서 아직 젊을 때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한항공이 운항하기 전에 교회 장로들께서 여비를 모아주셔서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고 미국에 갔습니다.”

60년대 말 한국의 국민소득은 100달러 수준에 불과했고, 국가산업 역시 공업보다 농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던 개발도상국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미국 이민 1세대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라서 박 목사가 현지에서 도움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그 시기에 미국에 있었던 한경진 목사의 도움을 받은 박 목사는 침대가 하나 놓여 있는 작은 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유학 초기에는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가지고 간 자금은 첫 달 월세와 생활비로 바닥이 났다. 연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한 부인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병원에서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박 목사는 포트워스에 위치한 텍사스 신학대학교에 합격한 상태였으나, 박 목사의 부인이 뉴욕의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박 목사 가족은 뉴욕행을 결정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전 재산이 300달러였는데 첫 달 월세가 250달러였어요. 월세 내고 생활비 내니까 없더군요. 다행히 부인이 일하게 된 병원에서 월급이 아니라 매주 나오는 주급을 받아서 그걸로 먹고 살았지요.”

생활이 어려운 와중에도 거금 80달러를 들여 중고 흑백TV를 장만한 박 목사는 테이블도 없이 바닥에 TV를 내려놓고 미국 방송을 보며 영어를 배웠다. 그렇게 배운 영어로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대학교의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박 목사는, 이어 1976년 뉴욕 신학대학원의 STM(신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가 미국에 온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박 목사의 동생 박희민 목사는 박 목사보다 먼저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선교를 위해 에티오피아로 간 박희민 목사는, 그러나 1971년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되면서 종교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그는 부인과 두 명의 자녀들을 형이 있는 미국으로 먼저 보내고 남아 있었으나, 몇 개월 버티지 못하고 1972년 에티오피아를 떠나오게 되었다. 박 목사는 동생을 설득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게 했고, 한편으로 동생과 함께 뉴욕에서 20여 명의 교민들과 함께 롱아일랜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캐나다의 한 교회에 문제가 생겨 교회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자 유호준 목사의 요청으로 박희민 목사는 캐나다의 교회로 넘어가서 15년을 목회한 결과 40여 명만 남아 있던 교회의 교민들을 1,500명으로 늘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두 목사 형제의 일편단심 목회는 계속되었다. 박희소 목사는 1975년에 개척한 뉴욕 동부교회에 있었고 동생 박희민 목사는 당시 LA 영락교회의 김계영 목사의 뒤를 이어 그곳에서 16년을 더 목회한 뒤 은퇴하게 된다.





한 뜻으로,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 창설

70년대 당시에는 뉴욕과 뉴저지의 한국 교민이 6,000여 명에 불과했다. 교회 또한 뉴저지에 한 곳, 뉴욕에 두 곳 뿐이었다. 그때는 초창기의 이민 세대들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과 달리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는 교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미국의 교민들에게 교회라는 장소는 종교 활동 뿐 아니라 지친 심신을 달래는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기독교 교민이라 하더라도 성결교, 장로교, 침례교 등 서로간의 교리가 달라서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다.

1997년 박 목사는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민들의 화합을 위해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를 창설하게 된다. 미국 전역에 약 200여 명의 기독교연합회 회장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미국 전 지역을 커버하지 못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작은 난관이었다. 50개 주에 달하는 미국 전체를 통합하려면 최소한 10개 이상의 도시연합회 회장들을 설득해야 했다. 특히수도인 워싱턴DC를 비롯해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텍사스, LA 등의 대도시들은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데 꼭 필요한 지역이었다. 박 목사는 전 지역과 연결을 시도하며 사비를 털어 약 30여 명의 연합회 회장들을 모아 전국연합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시작하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같은 성격의 연합인데도 지역마다 조금씩 이름이 달랐고, 같은 한국인이라 해도 지역별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모임 위에 더 큰 모임을 만든다고 하니까 협조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좀 넓어야죠. 각 지역의 회장 명단을 입수해서 일일이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50명 정도가 모이더라구요.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지역 회장들을 모아서 비행기도 지원해주고 파티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움직였죠.”

박 목사는 스스로 총연합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연합의 성격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노력했다. 첫 해의 모임은 뉴욕에서 이루어졌고 2대 모임은 시카고, 3대 모임은 LA에서 열면서 최대한 균형을 맞춰 나갔다. 현재 박 목사는 13대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연합에 참여한 지역별 회장들의 수가 모두 600여 명 정도이다. 처음과 같이 공평성을 유지하고 있는 연합의 2012년 모임은 뉴저지의 토론토가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 미·기·총에 가입된 회원이 약 600여 명 정도 됩니다. 모두 각 지역에서 회장직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미미했지만 내년에 벌써 14회 모임이 토론토에서 열려요. 약 1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일 예정입니다. 많이 발전했어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일반적으로 한 교회에서 20년 동안 목회를 하게 되면 ‘원로목사’로 추임되며, 은퇴 후에 평생 연금을 받거나 일시불로 받을 수 있다. 20년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라도 ‘은퇴목사’가 되어 퇴직금을 받게 된다. 1975년 뉴욕 동부교회를 개척한 박 목사는 2005년 1월 30일 원로목사로서 후임 황영태 목사에게 자리를 건네주고 은퇴할 때까지 30년간 동부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제가 운전을 40여 년을 하면서 사고를 한 번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격이 느긋한 건 아니거든요. 누가 제게 ‘어떻게 이렇게 성공하셨습니까’ 물으면 항상 같은 대답을 합니다. 그저 인내하고 참는 거에요. 교인들과 충돌이 좀 있어도 참고 넘어갑니다. 그렇게 30년을 넘게 지내니까 사람들이 인정을 해주더군요.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지 않아도 교인들이 참 오래 잘하신다고 칭찬해 주니까 저야 고마울 따름이지요.”

나무와 같이 한 곳에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파한 박 목사. 덕분에 한국에서 이민을 준비하는 교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에 가면 박희소 목사가 있다’는 희망어린 말이 퍼졌다. 은퇴 후에도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 미주기독교방송국 KCBN의 사장과 이사장을 6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여든이 다가오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직도 활동적이다. 크나 작으나 같은 신앙공동체로서 목회하는 것이 자신의 목회 철학이라 말하는 박희소 목사의 선교를 향한 기운은 아직 식지 않은 듯하다.

정재헌 기자 jjh052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