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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15 09:22
박판제 전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 총장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384  



시대적 국가 중대사 해결한 이슈메이커,
미래의 인재 육성과 대한민국 녹색성장에 기여할 터


평생을 재정경제, 정치, 환경, 디자인 등 국정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해 온 박판제 이사장. 남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맡은 직책마다 ‘성공’이라는 가치를 창조해내며 국가 중대사를 해결해 온 인물이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자리마다 그가 있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국가의 신임은 대단했는데, 어린 시절 구두닦이를 하며 주경야독의 고학으로 공인회계사, 행정고시에 합격,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 낸 박판제 이사장을 만나 구두닦이 어린소년의 화려한 일대기를 회고하며, 앞으로 그의 행보를 들어봤다.

동학의 후예, 구두닦이 소년으로 입지(立志)하다

니체는 한 인물이 나오기 까지 '선대에 그만한 대가를 치뤘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박이사장은 6대조가 1980년대 중반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였다며 낡고 바랜 교지를 보여주었다. 고조부께서 500여석을 한 지주였고, 조부께서 구한말, 3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고 한다. 고종의 고문이었던 헐벗트는 구한 말 집권층의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150량의 돈이 들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시골 유생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한들 합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조부는 동학의 의병장으로 참전해 하동전투에서 전사(31세)했는데 그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렸다.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유당시절 농지개혁 때 또 한번 가세가 크게 기울어 중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박이사장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큰 뜻을 품고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1950년 11월 15일 서울역에 도착한 그는 맨 먼저 불량배들에게 이끌려 으슥한 골목길에서 어렵게 마련한 노자를 다 털려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간 탐독해왔던 '학생계사'와 '학원사'를 찾아 사환자리를 부탁하기로 결심하고 미리 준비한 주소지를 찾았다. 학생계사는 이미 폐간된 뒤였고, 중구 양동에 있는 학원사를 찾아 힘겹게 김익달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포부와 청운의 뜻을 간절히 설명하고 사환의 자리를 부탁했는데 김 사장은 '전후 폐허속에서 불량건달패거리가 우글거리는 상황에 순진한 소년의 앞길을 걱정해 앞으로 학원과 중학강의록을 무료로 보내 줄테니 열심히 독학을 해 성공하라며 여비까지 보태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환의 자리를 얻지 못한 그는 허탈감과 실망감에 눈앞이 캄캄했고,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지금의 남산분수대 앞, 바위에 걸터앉아 서울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어떠한 경우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낯선 군인이 나타나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남산직업소년학교를 안내해 주게 된다. 그때부터 구두닦이와 야간중학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두닦이 첫날, 충무로 폐허 잿더미 근처에서 6~7명의 건달패를 만난 그는 상경동기와 향학의지를 그들에게 말해 건달패의 우두머리는 그를 그냥 보내주며 앞으로 생길 위기의 순간까지 대처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 2학년 가을, 고향 선배였던 공군중사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의 소개로 공군인쇄소 서울연락사무소 사환으로 취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환경이 좋지 않았던지 폐결핵 초기의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열심히 살고자하는 의지를 하늘에서 알기라도 하듯, 8개월 만에 기적처럼 완치가 되었고 당시 야간고의 명문이었던 덕수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1년 뒤 서울연락소의 소장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자 사환을 맡고 있던 박 이사장이 사환 겸 소장대행으로 일하게 되는 기회까지 찾아왔다. 또다시 1년 뒤 공군인쇄소에서 민간인쇄를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 연락소가 폐지되는 상황에 맞닥들이게 된다. 그러나 공군인쇄소의 간부들이 의논해 박 이사장이 졸업할 때까지는 연락사무소를 한시적으로 존속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드디어 고려대학교 상대에 무시험으로 합격(당시 정원의 20% 무시험 전형)이 되고, 가정교사로 취업이 되었다. 그의 합격과 취직소식은 공군인쇄창은 물론 공군 정훈감실까지 기쁘게 했고, 하늘의 태양은 더욱 빛나고, 북악의 찬바람도 그날따라 5월의 훈풍 같았다고 박 이사장은 회고한다.

개혁과 변화의 선구자, 노력의 중요성 일깨워

1963년 대학 3학년의 신분으로 제 9회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 이듬해에는 ROTC경리장교에 임명되어 육군중앙경리단 징수계장이 되었다. 창군이라 육군소위로서는 최초로 육군본부정책회의에 참석하는 등 육군통합회계제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경리의 날 기념 육군통합회계제도 도입에 관한 대 토론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대 후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행정고등고시 준비를 위해 장경사에 들어가 하루 3시간30분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책과 사투를 벌였다고 한다. 공부 도중 몸이 움직이지 않는 가사 상태도 경험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으며 난관을 극복하고, 첫 번째 시험은 아쉽게 59.25로 낙방하고, 1967년 제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재무부에 공직자로서 첫 둥지를 틀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천부적 능력과 공휴일도 반납하고 업무에 매진하는 각고의 노력은 고속승진과 함께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청와대 부실기업정리 총괄반장, 재무부 국고국장,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입법회의 경제전문위원, 청와대 대통령사정비서관, 조달청 차장, 환경청장 등 국정의 다양한 분야에서 국정의 주요인사로 거듭나게 된다. 박 이사장은 청빈공직자로 가는 곳마다 개혁과 큰 업적을 쌓아왔다. 이는 그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결코 굴하지 않고 항상 발상의 대전환이 가능할 만큼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에 대한 강인한 책임감과 추진력, 성취에 대한 집념과 애국심은 후배 공직자들의 귀감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거쳐 온 자리마다 어느 하나 미지근한 구석이 없을 만큼 늘 변화의 새바람을 일으켜온 주인공이다. 이것이 박 이사장의 거침없는 행보가 현재 진행형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변화가 필요한 요직마다 성공으로 이끈 국정운영의 미다스

박이사장은 1970년대 초, 청와대에서 부실기업정리 총괄반장으로 자리해 차관업체 300여개 중 부실기업 55개를 정리하고, 조일제철, 인천제철, 인천중공업, 한국철강, 동국제강등 철강공업의 구조조정, 5개의 PVC업체의 합병, 5개 수산업체를 합병 원양어선단 구성, 철강공업육성법, 자동차공업육성법, 섬유공업육성법 제정 등 국내 최초의 산업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재무부 증권과장 때는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해 증권시장 상장사 49개를 400여개로 확대하면서 포화상태에 있는 명동의 증권시장을 오늘의 여의도로 이전하는 등 증권시장 발전에 기여했으며,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시절, 소위 9.27조치 즉, 기업체질강화대책을 발표하고, 재벌의 방대한 계열기업과 비업무용 부동산을 신고처분 하도록 해 주력 기업에 집중 투자 하게함으로서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토록 했으며,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공인회계사에 의한 기업의 외부감사제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편 박이사장은 국보위에 대한 정치적 부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강조했는데 '모든 상태는 비록 소멸할 운명일지라도 필연적 발전단계이므로 모두 정당하다는 말은 잔인하리만큼 정당하다. 과거는 현재 속에 현실적으로 작용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말은 모든 역사 발전 단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활약은 청와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시절로 이어지는데 청탁배격운동과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으며, 부정선거는 정권의 존립을 담보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공명선거 정착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는데 1983년 금융실명제 반대가 빌미가 되어 조달청 차장으로 좌천되자 ‘국정에 중요치 않은 곳이 어디 있느냐’며 기죽지 않고 건설공사의 덤핑방지, 수의계약제도의 획기적 개선, 중앙부처 체육대회 종합우승 등 직원들의 사기진작과 단합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등 특유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조달청 차장 3년 6개월의 긴 기간 동안 골프를 등산으로 대체하고 매일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면서 '도시락 차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의 진가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환경청장에 부임하면서 수면위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경청은 이름만 '청'이었지 보사부 외청으로서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펼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또한 공해문제는 나날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 전두환 대통령에게 심각성을 직언하며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환경문제를 보고하고 본청조직의 확대, 전국수계별 6개 지방환경청과 환경관리공단, 팔당임호연구소 신설 등 조직체계를 확립함으로써 환경청을 명실상부한 중앙행정기관으로 만들어 오늘의 환경부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또한 무연 휘발유와 저공해 자동차 생산 및 보급, 향후 300년 이상 사용 가능한 김포, 영종도 쓰레기 매립장 건설 등 국내 환경정책 발전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특히 '더 맑게, 더 푸르게'를 청훈 겸 환경표어로 삼고 획기적 환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많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20세기를 빛낸 환경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국가의 디자인, 환경, 교육 사업에 일조

박 이사장은 1992년 14대, 1996년 15대, 무소속으로 자신의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허함에 빠져있을 때, 국제산업디자인대학원 학장 제의를 받는다. 산자부 국장급이 가는 자리이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부임했다고 한다. 그는 디자인의 범주가 '무덤에서 요람까지', '바늘에서 우주선까지'로 광범위하고, 학문도 경영학에서 시장론 디자인학으로 발전되었으며, 상품의 경쟁력도 기획력과 기술력, 디자인력의 결합이지만 디자인력이 절대적 결정요소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선 부임 할 때의 학장급을 총장급으로 승격시키고, 교명도 국제산업디자인대학원에서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로 바꾸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디자인은 국가경쟁력의 최후 승부처다', '디자인 강국이 되어야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라는 기본 컨셉 아래 디자인 의식 확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각계의 오너급 CEO를 위해 '뉴 밀레니엄 과정', 전문경영자와 중소기업자를 위해 '뉴 비전과정'을 6개월 코스로 개설했다. 이런 노력은 4년 간 뉴 밀레니엄 과정 300여명, 뉴 비전과정 200여명을 배출하고, IDAS KOREA 총 동창회가 발족되어 디자인 강국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디자인의식이 사회전반에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었고 지방정부는 물론 국가 장기 정책에도 반영되어 국가 브랜드 사업으로도 이어지고 있었다. 박 이사장은 자신이 유년시절 어렵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1991년 (재)지봉장학회를 설립해 2009년 말까지 중학생 290여명, 고등학생 380여명, 총 670명에게 3억 5천만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다. 매년 고등학생 1인당 100만원 씩 25명이 수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지리산, 덕유산 동편의 경남 벽촌의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해왔지만 앞으로는 지리산 서편과 덕유산 기슭의 호남지역을 포함, 대학생까지 범위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녹색운동에 일조하고 있는 그는 (사)녹색환경포럼 명예회장과 사랑의 녹색운동본부 명예총재로 추대되어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국민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박 이사장은 전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새로운 범국민적 운동으로 '녹색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고 있기도 하다.

끝으로 박 이사장은 현재의 교육문제와 세종시 문제 및 4대강 사업에 대한 견해를 덧붙였다. 우선 교육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는데 국내 최우수 인재가 집에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 직장에서는 상사의 말을 잘 듣고 성공한 사람이 40대 중반에 조기 퇴직해 집에 돌아와 보니 시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무능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며 이것이 우리 교육의 단면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교육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능력과 창의력이 계발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며, 대학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기되, 부정입시는 대학의 존립을 좌우할 정도로 강하게 처벌하고, 정부의 관여는 필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4대강 사업에 대해선 현재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역질문을 한다며, ‘한강과 중랑천, 양재천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 어떻게 되었겠는가?, 환경파괴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4대강 사업은 벌써 했어야 하고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입장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유역 주민과 국토의 효율적 개발 측면에서 순수하게 판단하여야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3가지를 강조했다. 오염된 환경과 영/호남의 갈등문제, 그리고 수도분할로서의 세종시라고 했다. 세종시 문제는 국가의 먼 미래를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현명한 국론통일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상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어온 박 이사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젊음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니라 특정한 마음의 상태다"라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와 장자의 무용지 유용(無用之 有用)을 인용하면서 간단히 답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미래학자들은 지금같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며 다만 앞으로 5~10년은 우리가 살아왔던 천년 이상에 해당되는 급속한 변화를 예측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같은 광속의 변화 속에서 변화를 예측하고 앞질러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자는 미래의 승자가 될 수 있지만, 변화에 근근이 따라가는 자는 현상유지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그것이 개인, 기업, 국가에 상관없이 존립자체가 위태로워 질것이라고 강조했다. 변화를 앞장서 이끌어갈 주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선진국 진입이 빨라 질것이고 세계주류로서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변화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희망찬 노년의 삶을 설계 하고 있는 박판제 이사장. 희망과 열정, 노력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준 그의 행보에 귀추를 주목하며, 그가 가는 길 마다 타인에게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 빛을 비추길 기대한다. 

정재헌 기자 jjh05220@naver.com